鄭禧燮 牧師의 ㅡ memorandum 中 一部 拔萃
淸道 豊角 松西 長老敎會篇 <6>
義城 復興 集會를 마치고 돌아와
즉시 본 교회에서 2 주 연속으로 부흥회를 개최했다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이지만 外來에서 초청하는 부흥 강사와
같은 최고의 예를 갖추고 全 성도가 겸손한 마음으로 부흥회에 임했다
최고의 禮는 未 傳道者를 많이 집회에 모아 놓는 일이다
우선 시장통 거리에 광목 으로 부흥회를 알리는 placard 를
내 걸고 골목 군데군데에 벽보를 부치고 2 주 전부터 전도지를
인쇄해서 집집마다 돌리고 온 성도가 총동원해서 1 대 1 전도를
목적으로 지역 사회 주변 전도에 힘썼다
특히 밤 전도 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入錐의 여지 없이
몰려와 교회 출입구에 선체로 부흥 집회에 참석했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로
환난의 일제 치하에서 은혜를 사모하여 飢渴했던
시들어 위축 된 영혼들이 가물음에 단비를 만난 듯 이른 봄의
새순처럼 파릇 파릇 甦生하여 성령이 충만했다
성도들이 눈물로 기뻐하며 손뼉 치며 주 하나님꼐 감사를 드리는
기도를 들어며
나는 마음 속에 많은 영적인 갈등을 느꼈다
解放된 한국의 수 많은 교회가 은혜를 받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여 사역하기를 원하여 나를 부흥회 강사로 초청을 하는데
그 수 많은 교회 가운데 나는 한 교회를 맡은~ 교회에 소속 된 담임 목사로서 교회가 지급하는 monthly pay를 받고 계속 교회에 매여 교회를 비울 수가 없기 떄문이다
기도 중 얻은 최상의 결론은 교회 담임을 사임하고
one's own expense 로 報酬 없이 자유롭게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의 제목은 ~
"하나님 전도의 산지[producting district]를 주시옵소서 "~였다
敗戰으로 脊薄한 땅에 滿身 瘡痍가 되여 헐벗고 못 먹어
말라 비틀어저 배고파 구걸하여 얻어 먹는 가난한 나라에서
전도 후원을 위한 재단이나 人材나 산압체가 있을리 만무했다
내가 스스로 전도의 산지[財源]를 만들어야 했다
당시 아무 것도 없는 荒蕪한 나라에 기댈 곳은 땅[土地] 밖에는
없었다 연구 끝에
전도의 産地는 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드는 일이다
사과나무를 栽培하여 10 년 후부터 그 수확된 과실을 팔아
전도의 산지[財源]로 삼는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한국은 농업 후진 국가로 특히 특수 작물 花卉 果樹
栽培에 대한 독자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미미했다
일본 서적인[ 農業과 園藝] [果樹 栽培法]등을 참고로
沙果 재배법을 연구했다
교회의 사표는 수리 되지 않고 목사님 전도의 산지가 완성 될 떄까지 1 년에 한 번만 부흥회에 나가시면 교인들이 과수원 조성에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赤手 空拳으로 山地에 과수원을 민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참으로 愚公移山의 발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을 한 이상 初志一貫하여 이 일을 成就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우선 豊角面 鳳岐洞 솔정지 [松亭]에 국도를 지나가는 신작로 가에 조그만 野山을 하나 구입 해서 경사가 완만한 양지바른 쪽 중턱 약 4,000 평을 開墾하여 사과나무를 심기로 했다
그떄는 개간을 위한 굴착기나 耕鋤用 중장비<Big Machine>가
없었다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인부를 동원하여 人力으로
톱으로 나무를 짜르고 삽과 괭이로 땅을 파서 나무 뿌리를
캐내고 낫으로 풀을 베었다
그때에 생각나는 happening으로는
산에서 伐木한 나무와 솔가지를 火木用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에서 말려서 소달구지에 싣고 운반했다
저녁에 일을 마치면 운반한 회수에 따라 임금을 지불 했다
어느 영수가 디른 인부보다 매일 두 셋 牛車를 더 신청을 했다
영수님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이 수고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영수님이 눈을 피 묻은 수건으로 가리고
일하다 말고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이놈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목사님을 속였습니다
하루에 몆 구루마<車> 씩 스무 구루마를 더 해먹고
돈을 챙겼더니 오늘 내 소가 내 不義함을 알고 뿔로 내 얼굴을
들어받아 눈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봉사가 될까 두려워 회개한다고 했다 덧붙여 죽는줄 알았다고
했다 영수님 얼굴에 손을 얹고 기도 했다
어떻든 나는 잘못을 알고 즉시 회개하는 영수님의 순수한 신앙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山地를 대충 開墾하고나서 과수원 입구에 道路를 만들고
居住할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울타리를 만들었다
노루와 멧돼지의 피해를 막기 의해서다
그런데 그 山이 참으로 dramatic했다 6. 25 사변 전 共産 guerrilla의 아지트요 빨치산의 本據地로 왕래하는 통로인 것을 몰랐다
나는 그들을 몰랐으나 그들은 나를 너무나 잘 안다고 했다
자기들의 아지트에서 매일 내가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러나 도와주지는 못했다고 했다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목사로서 면사무소 청소부로 일 하며
가난한 농민들을 돕고 겸손하게 자기들을 善對 했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자기들을 만나면 자전거를 탄체
인사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며 꼭 자전거에서 내려 모자를 벗어
들고 안부를 묻고 덕담을 하고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귀감이라 했다 ~<당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의 증언 >
그래서 자기가 빨치산들에게 목사님 놀라시지 않게 목사님이
개간한 과수원 울타리 안에는 절대로 들아가지 말고 서성거리지도 말며 주택에 들어가 식량이나 옷가지를 요구하지도 말고
밤에 野營 할떄 불을 조심해서 피우고 퇴거 할 떄는 꼭 불을 끄고
음식 먹은 찌거기를 꼭 치우도록 지시 했다고 했다
그리고 手榴彈과 銃機類의 誤發이 없도록 잘 관리하게 하도록
지시 했다고 했다
자기들이 엄동설한 추운 밤에 목시님 집 온돌 굴뚝에서
따뜻한 연기가 모랑 모랑 피어 오를 때는 잠시 들어가 몸을 좀
녹이고 음식을 얻어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고도
증언 했다
어떻든 빨치산은 당시 살인 방화 약탈을 金日成 아바이와 인민의 이름으로 茶飯事로 恣行했으나 내가 머리털 한 올도 상하지 않는 이와 같은 破格的인 例外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6 篇>.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