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禧燮 牧師

鄭禧燮牧師의 淸道豊角松西敎會<5>

chung si yoo 4932 2013. 6. 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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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禧燮 牧師의 淸道 豊角 松西 長老 敎會 篇<5> (0점) | 鄭禧燮목사님[회상] 2012-09-16
오전 11:48:17

 

 

 鄭禧燮 牧師의  ㅡ memorandum 中 一部  拔萃

 

淸道 豊角 松西 長老敎會篇 <5>

 

1945 年 世界 2 次 大戰이 日本의 敗亡으로 終熄되고부터는 

敎會 復興의 거센 氣勢가 燎原의 불길처럼 퍼자 나가기  始作했다 

흩어진 敎人들이 四方에서 모여들고 허물어진 敎會가 再建되었다 

日帝의 信仰 抹殺의 桎梏에서 벗어난 聖徒들은 

感謝와 感激의 눈물을 흘리며 목청이 찢어지도록 크게 讚頌歌를 불렀다 

解放의 기쁨과 더불어   聖徒들 모두가 信仰의 自由를 滿喫했다 

그러나 그 동안 日帝의 彈壓으로 信仰의 싹이 짤리고 萎縮되어

가물음에 목말라 죽어가던 靈魂들에게는 眞理의 nutrient 가 必要했다

靈魂의 渴求를 解消하는 方法으로 敎會마다 심령 復興會가

雨後 竹筍처럼 頻煩하게 開催되었다 

 

解放 直後~復興會를 引導한 敎會 擔任 牧師 가운데 오랫동안 交際하며

記憶에 남는 牧師는 慶山 沙月 敎會를 視務하던 朴瑢默 牧師다

그는 十四歲 年下이나 兄弟의 友誼로 서로 尊敬하던 牧師다  

그는 그 當時 한국의 D.L Moody 가 되기 위해 韓國 全人口의

救靈化를 위한 目標를 세우고 祈禱 中에 있었다 그 때의 復興 査經會는 

月曜日날 저녁 傳道 集會에서부터 새벽 기도회 및 낮 聖經 공부 밤 집회로 

主日 낮 禮拜까지 都合 十八 集會를 引導했다 朴牧師는 復興 說敎의 要旨를

集會 때마다 全部 노우트에 記錄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했든 復興 牧師

들의 說敎도 그 內容을 窮鑿 ~ 硏究 分析 하여  이미 獨自的인 復興 說敎의  

<kerygma를 重視한>frame을 만들고  聽衆과 쉽게 恩惠를 疎通하는 說敎로의

方向 變化[paradigm shift]를 試圖하고 있었다 

 그의 使命을 追求하는 熱情은 참으로 大段했다

그리고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 臨事而懼로 謙遜했디

그가 大邱 동신 敎會에 視務핳 때 나도 大邱에서 牧會를 했는데

牧會와 復興 集會의 奔走한 日程 속에서도

嶺南 大學校 國文科에 學籍을 두고 國文學 硏究와 言語學에 대한 speech

function 및  facility of communication도 연구했다 그리고

漢文學 공부에 邁進했다 漢詩作에 대한 論文을 쓸 때는 자주 나를 찾아와

만나서  諮問을 구하고 論議했다

그가 그 후 十萬 救靈化의 旗幟를 높이 들고 도시와 農村 어느곳이나

坊坊 曲曲 두루 다니며 千回가 넘는 復興 集會를 引導하여 많은

열매들을 收穫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한  韓國의 赫赫한 大復興師로

하나님께 榮光을 돌리게 된 裏面은 그의  學究慾과 부지런함과 誠實性에 있다 

慶山 沙月 敎會 復興會를 마치고 돌아오니 바로  高靈 邑 敎會에서 復興會

要請이 와 있었다 한 주일을 내가 섬기는 松西 敎會에서 예배를 인도 한 후

高靈 邑 敎會 復興會를 인도 하기 위해 떠났다 

 

 

高靈 邑 敎會 復興會 引導 寫眞

 

高靈 敎會 復興會는 불 같은 ~                               

聖靈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恩惠가 마른 땅에 소나기와 같이

沛然히 쏟아젔다 그 당시는 한 교회에서 復興會를 開催하면 隣近

各 敎會의 敎役者와 재직들이 같이 참석하여 부흥회를 共有했다

새벽 기도회에는 십리 혹은 이십리 밖에서 초롱불을 들고 산 구비를 돌고

내를 건너 예배에 참석하고

~더 먼 地方에서 온 성도는 아에 徹夜 기도로 예배당에 자리를 깔았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高靈 郡內 여섯 個處 교회가 順番을 定
하여 ~復興會 날자를 定해놓고 卑俗한 말로 하나님의 恩惠를 값 없이 받는데

누구는 人蔘 먹고 누구는 무우 먹나 式으로 莫無可奈로 自己가 섬기는 敎會에

꼭 復興會를 開催해야 된다는 것이다

참 難堪한 일이다 내가 섬기는 敎會 성도들은 주일마다 어떻게 할 것인가 ?

電報로 長老들에게 諒解를 구하고 連續 여섯 주를 더 復興會를 順序대로

인도 했다 새벽 낮 저녁,  高靈 邑 敎會까지 도합 49 일 136회의 설교를 繼續

하고나니 聲帶가 붓고 소리는 husky로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集會를 마치고 돌아오니 또 義城 達城 星州등 수십처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요청하는 편지가 와 있었다  그 가운데 여덟 교회를 골라 장로들과

상의 했더니 장로들이 理性을 잃고  펄쩍 뛴다

목사님 생활비를 교회가 꼬박 꼬박 지급을 하는데 주일 날 목사님 설교는

고사하고 강단에서 얼굴조차 볼 수가 없어니 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목사님 또 두 달 동안 교회를 비우면 우리 羊들은 어떻게 합니까 ?

장로들이 설교의 限界가 왔다는 것이다 밑천이 떨어저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長老들은 苦肉之計로 새로운 planning 과 idea 로 나를 復興會에 나가지

못하게 brake를 걸고 본 교회에 붙들어 두기 위한 背水의 陣을 첬다

牧師님 다른 敎會에 恩惠를 끼치는 것도 좋지만  우리 敎會도 深度 있는

靈的  회복이 당장 必要하니

목사님 義城 敎會 두 곳만 復興會를 나가시고 돌아 오시는 데로 牧師님을

모시고 연속 2 주를 本 교회에서 復興會를 하자는 것이다

擔任 목사를 부흥회 강사로 자기가 맡은 교회에서 2 주  36 회 집회를 개최하는

교회는 없었다 그러나 生覺을 해 보니 一理가 있었다 長老들의 建議를 肯定的

으로 수용 했다

 

                    <  5편 >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