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08(금요일) 정국현의 아침斷想
정국현 歷史小說
불국토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⑯ 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대안!”
정을 듬뿍 실은 귀 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점개가 대성의 등 뒤에서 환하게 웃고 서 있었다.
“선사님! 그간 편안하시었사옵니까?”
대성은 합장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래...대부인大夫人(남의 어머니를 높인 말)은 만나 뵈옵 고?”
“ 그러하옵니다. 자친慈親(살아계신 자신의 어머니)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는 중이실 것이옵니다.”
“ 경천내효敬天乃孝(하늘을 공경함이 효도)하니 청향만당淸香滿堂 (맑은 향기가 집안 가득함)이로구나! ”
점개는 대성과 경조가 매사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축원祝願하며 대성에게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집안대대로 충효를 전수하고 세상에 처할 때는 인경을 신조로 하라)라는 법문을 설 했다.
“ 충忠이라함은 사군이의事君以義이니 의리로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며 효孝란 선사부모善事父母이니 부모님을 잘 섬기고 공경해야 함을 이른다. 또한 인 仁이라함은 미물微物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심을 내는 것이요, 경敬은 경계警戒(옳고 그른 경위가 분간되는 한계)하고 긍구兢懼(삼가하고 두려워하다)함을 이른다하니 대성이는 이를 마음 깊이 새겨 이후 더욱 본연지성本然之性(모든 사람이 본디부터가지고 있는 착하고 평등한 천성)을 갈고 닦아야 함이야.”
점개는 이제 진골로서 새 삶을 시작하는 대성을 권선勸善(착한 일을 하도록 권장하다)했다.
경조와 대성의 송별연送別宴이 파할 무렵 복안장자의 집으로 승부乘府의 파발마擺撥馬가 도착했다.
서류를 넣은 피대皮帒(가죽주머니)에는 방울이 하나 달려있었다.
일급시一級時였다.
승부의 우역郵驛이란 공문서의 전달, 관물의 운송, 공무를 띤 출장관리의 숙박편의 등을 위해 설치한 국가의 육상 통신,교통 기관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록은 신라 487년 소지왕 9년에 고역전과 경도역이다. 병부에서 역의 사무를 관장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승부로 옮겨왔다. 전달방식은 현령식縣令式 전달이라 하여 체부遞夫가 서류를 넣은 가죽주머니에 방울을 달고 중계적中繼的으로 달렸으며 일의 완급緩急에 따라 3급시에는 방울 셋, 2급시에는 방울 둘, 1급시에는 방울하나를 가죽자루에 달았다
“ 아찬님!”
“복안 아찬님!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옵니다.”
와기전瓦器典 사史가 체부와 함께 부복을 하고 있었다.
(와기전瓦器典은 내성內城 소속으로 도기陶器류 생산을 담당하는 곳으로 관원 간 1명 밑에 사史 여섯 명을 두었다.)
복안장자는 공문을 열어 보았다.
“ 모량리牟梁里 출신 복안을 금일今日부로 내성內城 와기전瓦器典 간干에서 파직罷職 함”
그 시각 승부 산하 모든 체부들이 1급 방울을 단 피대를 싣고 14부 19전을 비롯한 44개의 관청, 내성과 어용성, 동궁관등 116개 관청의 모량리 출신 관원들의 집으로 일제히 내달리고 있었다. 고승들이 많은 왕실의 가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라벌의 관아와 왕실 가람의 모량리 출신 사람들은 폭풍전야暴風前夜같은 깊은 수렁에 서서히 빠져 들고 숨을 죽이고 움츠리고 있었다.
이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계속)
관작루에 올라
왕지환(688-742)
백일의산진
황하입해류
욕궁천리목
갱상일층루
登觀鵲樓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浴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눈부신 해는 산 넘어 떨어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네
천리 밖까지 바라보고자
다시 한층 누각을 오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