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國鉉>>
12월 11일(월요일) 정국현의 아침斷想
정국현 歷史小說
불국토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⑰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복안이 파직 통지通知를 받은 그날부터 7주야晝夜를 왕경 계림에서 첨성대 사이의 모든 관아 담장과 민가와 구분하기위해 토장성벽土墻城壁으로 둘러싼 담벼락까지도 벽보壁報(방榜)가 일제히 나붙었고 길 위에도 관보官報가 계속 뿌려졌다(서투노상書投路上).
그리고......
“
勅牟梁理人從官者竝合黜遣 更不接公署
칙모량리인종관자병합출견 갱불접공서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불저흑의 약위승자 불합입종고사중
勅史上侃珍子孫 爲枰定戶孫 標異之
칙사상간진자손 위평정호손 표이지 ”
거매금 이홍(효소왕)은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렸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쫒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선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었다.
화랑출신 장군으로 김유신과 함께 백제군을 격파하고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정벌에도 참여했으며 진덕여왕, 태종무열왕,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많은 공을 세운 진골 이벌찬(신라관등1위) 죽지竹旨의 낭도들 중에는 득오得烏라는 낭도가 있었다. (득오는 후에 급간(신라관등9위)이 되었음.)
그는 풍류황권風流黃卷이라는 화랑명부에 낭도의 적을 두고 매일 나오다가 열흘 동안 나오지를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죽지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물어보니 ‘당전幢典(군대 책임자)인 모량부의 익선 아간阿干(아찬:신라관등6위)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창고지기)으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라고 말을 했다.
부산성富山城은 ‘주사산성’으로 불리며 석축산성으로 서라벌(경주)의 서쪽에 해당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부산성은 또한 주사산, 오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으로 황석을 이용해 쌓은 석축성이다. 이곳에는 성문4개, 건물6개소, 우물터 4개소, 못이 2개가 있었다. 산모양이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해서 소산小山, 소문산小門山, 여근산女根山이라고 불리며 여근곡女根谷은 이 산의 골짜기를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여근곡에 대해
“선덕여왕 5년, 어느 겨울날 도성 인근의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모여 울었다. 여왕은 두 명의 각간에게 병사 2천 씩 주어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 병사 5백을 섬멸하게 하였다. 신하들이 그 지혜를 궁금하게 여기자 여왕은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상像이요, 옥문은 여근이다. 여자는 음이요, 그 빛깔은 흰데 흰 것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적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라고. ‘또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듯이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죽지는 ‘네 아들이 사사로운 일로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하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하겠다.’ 말하면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가지고 노복들과 의장을 갖춘 낭도 173명도 함께 데리고 갔다.
부산성에 이르자 문지기에게 ‘득오는 어디 있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문지기는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서 일합니다.’하고 대답하였고 죽지는 익선에게 가서 예의 갖추어 ‘득오에게 휴가를 내려주면 감사 하겠다’고 부탁하면서 ‘같이 돌아가고 싶다’고 간곡히 청했으나 익선은 완강히 반대하며 거절했다.
이때 사리使吏(세금 수취인) 간진侃珍이 추화군(밀양)의 능절조 30석을 거두어 부산성으로 싣고 가다가 이를 목격하고 겸손하고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죽지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융통성 없는 것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있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사지使知(세금 수취인)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화랑의 일을 보는 관리)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고자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 가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거매금 이홍(효소왕)이 대노해 칙령을 반포頒布(세상에 널리 퍼뜨려 모두 알게 하는 것)하게 되었고 모량리 사람들 한날한시에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야심한 시각, 복안장자의 집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모량부 출신 전직 관료들이 이를 수습하는 대책회의를 하고자 복안장자 집으로 속속 모여 들고 있었다.
이미 넓은 사랑에는 점개선사를 비롯, 복안장자, 그리고 모량부 손씨 존장尊長과 6두품이상 그 구성원들이 둘러 앉아 있었고 뜰에는 4두품, 5두품의 많은 손씨 일가들이 모여 서 있었다.
손씨 존장尊長 도녕道寧이 일어서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 우리 모량부는 일찍이 샤량부 김씨왕족과 혼인관계를 통해 연합하고 연대 해 왔소. 지증미립간 왕비 연제부인, 지철 노왕비, 법흥왕비 보도부인, 진흥왕비 사도부인, 진지왕비 지도부인등 모두가 그 실례인 것이요. 그래서 모두들 우리 모량부를 왕비족이라 칭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선덕,진덕여왕 이후 우리 왕비족은 존재 가치가 점점 희박해 지다가 김유신계 문명황후(누이동생 문희)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우리 모량부는 사실상 왕비를 배출하지도 못하고 오늘까지 쇄락의 길만을 계속 걷고 있었소.
온 모량부가 재기를 노리고 고심하고 있는 이때에 익선이 사고를 저질러 이 같은 참화를 겪고 말았소.
이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서 모량부가 앞으로 나아 가야할 길과 방향 그리고 좋은 수습책도 함께 제시해 주면 좋겠소.”
도녕 존장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모두冒頭발언을 한 후에 자리에 좌정했다.
전 사정부司正部(백관을 감찰하는 기관) 최고의 수장인 영令을 역임한 종오鐘烏장자가 좌중을 돌아보면서
“ 이번 익선의 사건을 돌이켜보면 80세의 고령에다 신라 최고의 어른인 죽지 이벌찬어른이 명령을 내리지 않고 간곡한 청을 넣은 것은 익선은 모량부에서 역역力役동원, 군역의무자를 징발하는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요, 또한 이것이 익선이 소신껏 죽지 어른의 청을 당당히 거절 할 수 있었던 정당한 이유요. 그래서 이 사건의 증인인 사리 간진도 익선의 행동을 두고 ‘융통성 없다(鄙宣喑塞不通)’고 만 말한 것이라.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익선은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한 것이 분명하며 득오 역시 소속부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요.......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나...
그다음 익선의 배임수재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할 말은 없으나 이 사건이 확대 해석이 되어 모량부 전체가 지역적 연좌제로 묶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더 불합리하고 가혹하다 아니 할 수밖에 없소.
해서 이번 배임수재 사건이 모량부 전체의 연좌제와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내어 상께 아뢰어야하겠소.
내 늙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이일에 앞장서리라!”
종오장자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강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젊은 관원들은 모두 힘을 모아 상소문上疏文의 초를 잡아주시오.”
이때 지원智圓이라는 젊은 5두품 관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 삼가 말씀 받자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뢰올 일은 도력이 뛰어나신 원측대사가 모량리 출신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승직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으시고 가람 출입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옵니다.
이는 우리 모량부인들의 신앙관까지 말살 하려는 상병벌모上兵伐謀(교묘한 전략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 손자병법 모공편)한 계책이옵니다.”
그랬다.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와서는 갑자기 발톱을 세우는 거대한 회오리바람 같은 모든 것을 일시에 정지시키는 무서운 음모가 그 안에 숨어 도사리고 있었다. (계속)
오도송
소동파
계성변시광장설
산색기비청정신
야래팔만사천개
타일여하거사인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개울물 소리는 장광설이요
산 빛은 어찌 청청한 몸이 아니랴
어젯밤 다가온 무량한 이 소식을
어떻게 그대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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