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국토에 핀.예수》
11월21일 (화요일) 정국현의 아침斷想
불국토 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⑦ 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681년 7월 1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의 맏아들인 태자 정명政明이 1주일 뒤인 7월7일 선왕의 구전(柩前: 널[관]앞에서)에서 신문왕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그 10일후에 동해의 대왕암에서 선왕을 장사 지냈다.
그리고 장례를 치룬지 한 달도 채 되기 전인 8월8일, 신문왕의 장인 되는 진골 소판 김흠돌이 파진찬 홍원, 대아찬 진공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었다.
상喪중에 서울에서 난亂이 일어 날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도 왕의 장인에 의해서 말이다.
후세 사가史家들은 이 엄청난 역모逆謀사건을 ‘김흠돌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흠돌이란 위인爲人(사람의 됨됨이)에 관해서는 본시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이며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믿고 오만傲慢 방자放恣 하다고 적고 있기도 했다.
점개는 당나라 황제처럼 백룡마白龍馬를 타고 습관처럼 입술을 비틀며 비죽거리고 장안을 휩쓸고 다니며 온갖 나쁜 짓이라는 나쁜 짓은 골라서 다하는 김흠돌의 사악한 미소를 떠올렸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이야. 암... 그렇고말고...... ”
성문 위 팔괘가 그려진 남, 백, 홍, 흑, 황기旗가 청룡과 백호, 주작(봉황)과 현무(거북),등사(뱀)와 어울리면서 망나니(회자수劊子手)들이 춤을 추듯 어지러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이 참수 당했던 역모현장에 세워 두었던 그 깃발들을 처럼.
비릿한 피비린내가 홍기紅旗 위로 스믈스믈 기어오르고 있었다.
“ 선사님! 선사님! 이리로 어서 오르시지요.”
화랑 대정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점개는 성문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긴 사다리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대안大安-, 대안 하시게!”
점개는 성문 누각을 향해 합장을 한 후 내려오고 있는 사다리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성 회곽도(성채위의 회랑. 군사들이 경계를 서거나 적을 방어하는 도로)를 따라 어두움이 조금씩 몰려오고 한 두 방울 비 꽃이 여기저기에서 피기 시작했다.
김유신 누이 정희가 나물왕 후예 달복과 혼인을 하고 두 아들 흠돌과 흠운을 낳았는데 그 중 장남이 김흠돌이다. 그는 김유신의 딸 진광과 결혼했으니 또한 김유신의 사위가 되며 무열왕비 문명 황후 문희의 조카이기도 했다.
김흠돌은 파진찬 선품의 딸 자의慈儀의 미모에 반하여 첩으로 달라고 조르고 겁박까지 했지만 자의의 어머니 보룡宝龍이 이를 막고 나섰다.
흠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가 있다고 믿었는데 자의만은 경화수월(鏡花水月: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볼 수 만 있고 가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이었다.
꼭 첩으로 삼겠노라 맹세까지 하며 집요하게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 후 자의가 태자 법민과 혼인을 하고 태자비가 되자 놀라 이모인 문명 왕후에게 자의가 덕이 없다고 꼬드겨 왕실에서 내 쫒으려 했었다.
태자 법민이 문무왕으로 보위에 오르고 태자비 자의가 왕후가 된 후에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휘둘러 오던 흠돌은 자신의 딸을 태자 정명政明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고 국구國舅(왕의 장인을 높여 부르는 말)가 되었다.
흠돌과 자의의 악연은 그 긴 세월을 그렇게 반복되고 있었고 자의는 때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호시탐탐虎視耽耽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다.
뒷배를 봐주었던 이모인 문명왕후가 죽자 지난날 지은 죄 때문에 흠돌은 초조焦燥해지기 시작했다. 문무왕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 되어 정사를 돌볼 수가 없게 되자 자의왕후와 태자 정명은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져 갔다. 그와 반면에 자신의 딸은 태자 정명의 총애를 잃어 버린지 오래 되었고 자식도 하나 없이 껍데기만 남은 허울 좋은 태자비였기에 흠돌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흠돌은 갈수록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자신과 같이 김유신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백전노장 상대등 진골 김군관을 오른팔로 삼아 병권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많은 진골들을 매수해서 행정부까지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왕이 되고자하는 역심의 발톱을 숨긴 채......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자의왕후는 문무왕의 병세가 점점 악화 되자 오기공을 불러 호성 장군으로 삼아 왕실을 보호하려 했지만 진공은 인부印符를 줄 수 없다고 버디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역모가 은밀히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던 곳 중심에는 진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개는 김흠돌의 측근들을 통해 이러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흥륜사 중건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한 집사부 파진찬 김문양에게 이 일을 귀띔을 해 주고 중도의 길을 가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던 중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 김군관이 병부령으로 강등이 되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흠돌은 문무왕이 승하하고 태자 정명이 신문왕으로 왕위에 오르는 어수선한 때를 노려 거사를 서둘러 강행한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역모는 곧 오기공에 의해 바로 발각되고 실패로 끝났었다.
신문왕은 이때 난을 평정하면서 김흠돌과 전혀 관계없었던 장수들과 많은 진골들도 함께 왕권강화라는 명분 아래 희생 재물로 참수 했었다.
‘김흠돌의 난’ 때 파진찬 진골 김문양도 ‘가만히 있었다’는 죄목 하나로 체포 구금되어 7년여를 외딴 섬에서 고독하게 지내는 절도안치絶島安置를 당했었다.
“선사...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오. 잘 부탁하오. 잘 부탁하오.”
김문양이 귀양살이를 떠나던 날, 점개에게 핏덩이 대성이를 부탁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뿌렸다.
왕성 아래 남천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까맣게 몰려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석문을 지나 무열왕이 머물렀던 옥문골 대궐 앞 군막으로 대정이 앞장 서 점개를 안내하고 횃불을 든 낭도들이 불을 밝히고 그뒤를 따르고 있었다.
‘파르르’ 연기와 함께 송진을 흠뻑 머금은 관솔불이 산성의 어둠을 조금씩 지워 주고 있었다.
멀리서 여우 울음소리가 간간이 바람에 실려와 군막 안을 밝히는 밀랍초 위에 앉더니 여우 꼬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선사님!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크시었습니다.”
좌정하기를 기다렸던 대정은 큰 절을 올렸다.
“아닐세. 아니야.”
점개는 손사래를 치다 말고는 진지한 대정의 모습에 합장을 한 후 반배로 답했다.
그리고는 촛불이 일렁이는 사이로 드러나는 대정의 얼굴 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
“선사님!...뭐가.. 잘못 되었.. 는... 지요?”
“아...아닐세. 아무 것도.”
점개는 대정을 보면서 머리는 크고 이마는 평평했던 대성이와 쌍둥이처럼 똑같이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상경賞景
김립金笠
일보이보삼보립 一步二步三步立
산청석백간간화 山靑石白間間花
약사화공모차경 若使畵工模此景
기어림하조성하 其於林下鳥聲何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보니
산은 푸르고 바윗돌은 흰데 사이사이로 꽃이 피였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속의 새 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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