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書 (133)~~아버지가 일본 선교의 첫 사역지인 豊橋市とよはし[~花田町~掘先 ~二丁目에 우리 가족^어머니와 형과 내가~ 1935년 에 도일 정착 했다 당시 豊橋 とよはし~는 한국에서 이주한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조센진<朝鮮人> ちょうせんじん 이라고 차별하고 닌니꾸 쿠사이< にん にくくさい><<마늘냄새 /추한 냄새 난다>고 혐오<嫌惡>하고 무시했다 아버지는 성품이 정의롭고<剛毅正大>/ 옳타고 생각하면 자기 주장을 궆히지 않고 <被執不屈> / 모나지 않고 모든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며 <圓轉滑脫> / 너그럽고 부드럽다<寬裕溫柔> / 그기에다 모든 일을 싫증을 내지 않고 개을리 하지 않는다 <不倦不懈> / 목표를 정하면 꼭 이루기를 노력한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내 일생에 가장 큰 스승이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선교에 헌신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여 그야말로 심명을 받처 지사충성<至死忠誠>하기로 작정 했다 아버지는 일본선교의 첫단계가 교민들의 자존감과 위상을 높이는데 있다고 생각해서 1~일본어의 원활한 언어소통과 2~자급자족을 위한 일인 일기 기술을 먼저 습득을 하도록 했다 교포 청년들을 운전 교습소에 안내 수강하게 하여 三輪車 /오토바이 /추럭 /의 운전면허를 따서 생활의 안정을 도모 하도록 하고 교민을 대 할 때 의<義>와/ 예<禮>와/ 신<信>과/ 겸손<謙遜>으로 대하여 모범을 보였다 일본인들도 아버지를 믿고 예로써 대했다 주택의 임대 ~취직 알성 민형사문제 등 ~일본인들은 목사를 샌새이<先生> せんせい라고 불렀고 전적으로 아버지를 믿고 모든 문제를 맏기고 돕고 해결해 주었다 교회는 날로 더욱 부흥 발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교인들의 직종은 대부분이 행상으로 (큰대나무광주리에 현미빵을 자전거에 싣거나 "리야까-(リヤカ-)"에 싣고~ 겐마이빵(玄米パン)" " 겐마이빵(玄米パン)~하고 외치며 팔며 때로는 생선을 싣고 “이와시” “이외시‘ "いわし[鰯]" "いわし[鰯]"하며 팔로 다녔다 그리고 체소 장사를 하는 사람 그리고 고물상을 하는 교인들의 대부분이였다 주로 문제가 되는 직종은 고물상으로 장물을 사서 판 죄로 경찰에 구금 되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아버지가 통역하고 판사의 허가를 받아 법적인 변론도 도맡아 했다 아버지는 청년시절 일본 유학파로 일어에 능통하고 법학을 공부했기에 변호사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일인사회의 유명인사가 되고 존경을 받았다 일본인 교회와도 유대관계가 원만하여 자주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다 한국 목사의 깊이 있고 유창한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성도들이 선물도 보내왔다 ~~<**계속>
~뒷줄 중앙 主禮者정희섭목사 / 중앙~신랑 신부 아랫줄 ~들러리 <미요짱>/<정시유장로>/~
'隨想의 窓<隨筆>' 카테고리의 다른 글
~** 落書 (135) (0) | 2023.04.04 |
---|---|
~**落書 (134) (0) | 2023.04.03 |
~**落書 (132) (0) | 2023.03.30 |
~**落書 (131) (0) | 2023.03.28 |
~**落書 (130) (0) | 2023.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