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의 窓<隨筆>

**아버지 4 **

chung si yoo 4932 2018. 10. 23. 21:36

아버지 4

친구집에서 놀다~집에 돌아왔습니다


내 책상 위에는 책가방과,

교과서와 공책 연필 등............

학용품과 연필 깎개 칼 20여 자루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내 소지품 일체 <一切>를

검사한 것이였습니다


오늘의 문제의 핵심은 피하시며~


새 학년에 공부 할 책들을 내어놓고~
서책에는 만종록 <萬鍾祿>이 있다고 하시고~

책은 귀중한 것이니 낙서를 절대로 해서는

않된다고 훈계하시면서

교과서 마다 책껍질 <Book Cover>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문제의 핵심은 칼이였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 사이에는

연필 깎개 칼의 다과 유무가

학급 leader ship과 부<富>의 상징이 였습니다


일제 말기~ 식민지 경제 말살 ㅡ수탈 정책으로
우리 나라가 ~참 가난했던 시절이 였습니다


그 당시^^
국민학교에서 사용하는 도화지 , 습자지 . 연필 .
칼 . 지우게 등.....교과 용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수십 자루의 칼을 가지고

부자집 아들 ^^~
또는 복덕방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칼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칼을 빌려 주기도 하고

거저 주기도 했습니다

대신 연필도 받고 지우게도 받았습니다

우정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칼의 출처가 문제 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칼이 왠 칼이냐고 물어셨습니다

나는 문방구에서 샀다고 했습니다

재차 물어 셨습니다

나는 설명하기가 번거러워 또 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방구점에 가자고 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아버지께서 문방구점 주인을 찾았습니다

상점 주인은 ~이 학생에게 이렇게 많은 칼을 판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성을 참는 모습이 역연<歷然> 했습니다



가정 예배 때 마다 말씀의 중심은 정직 <正直>이 였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죄과는 ~
초달 <楚撻>이었습니다
두 종아리에서 피가 흘었습니다


~ "나는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 "이 칼은 운동장에서 주워 모은 것이라 "했습니다

~ "주은 것을 제가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


~~나는 아버지께 항거 했습니다

치졸한 궤변이 였습니다


아버지는 또 초달을 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의도적인 습득물 횡령죄라 했습니다


아버지께 말씀 드렸습니다

사건의 전말 <顚末>을..........


~조회 시간 10분 전은

눈이 뱅글 뱅글 돌 정도로 바쁜 시간입니다

평양 서성 국민 학교 5 천여명 학생들의

놀이 기구는 규모가 빈약하고 부족했습니다 ,

철봉대 앞은 장사진<長蛇陣>이 였습니다

철봉에 메달린 놈이 한 바퀴 빙글 돌면

주무니에서 칼이 뚝 떨어지고...

다음 놈이 또 돌면 칼이 둑 떨어지고, 돌때 마다

칼은 뚝 뚝 떨어지는데........

떨어지는 칼을 짝꿍과 깥이 (이건 공모다 )

양편에 서서 발로 밟아 모래 속에 집어

넣는 것이였습니다

조회를 알리는 싸이랜이 울리고,

마이크 소리를 따라~
아이들은 학반별로 운동장에

급히 정렬하기 위해 삼삼오오 뛰어 달리기 시작하고 ,...

~우리는 비호같이 칼을 챙겨 주무니에 넣고....
태연하게 학반 뒷 줄에 가서 서고.~

하루에 주은 칼이 Total 20자루는 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또 말씀 하셨습니다

주은 것의 동기가 나쁘다고 했습니다

줍도록 유도하고.

습득물을 의도적으로 횡령하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과 같이 .....

큰 죄라 했습니다


세월은 석화 <石火>와 같이 흘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빛바랜 습자지에 휘호한

아버지의 글씨!

<도불습유>

<道不拾遺>란 글귀를 보았습니다
이 글 귀는 ~

史記/商君列傳(사기/상군열전).
孔子世家(공자세가).
韓非子(한비자).에서 출전 했으며~


<<사기>> 상군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디다.
상군(商君)은 위(衛)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앙(앙), 성은 공손(公孫)이다했습니다.
젊었을 때 형명학(形名學)을 좋아하여 정승 공숙좌(公叔座)를 섬겼습니다.
그가 죽고 위나라에서 중용하지 않자, 천하의 영재를 구한다는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에게 찾아갔습니다.
효공을 설득하여 좌서장(左庶長)으로 변법(變法)의 개혁을 단행했는데,연좌제와 신상필벌의 법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
물론 여기에는 왕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태자가 법을 범하자 태자의 보육관인 공자건(公子虔)을 처형하고, 사부 공손가(公孫賈)를 자자형(刺字刑)에 처하는 등 그 실행이 엄중하였습니다 .
법을 시행한지 10년, 길에 떨어진 것을 줍는 자가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 졌으며, 전쟁에 나가 연전연승할 만큼 군사가 용감해 졌습니다.

당시의 사회상황을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으며[道不拾遺],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다[山無盜賊].˝

효공이 죽고 혜문왕이 오르자 상군은 죽을 것을 알고 스스로 도망하였으나, 함곡관에서 여행권없는 자의 유숙을 금한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 국경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혜문왕은 상군을 잡아다가 거열형에 처하였습니다.

<<한비자>>에 보면 춘추시대 정(鄭)나라 재상이었던 자산(子産)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자산은 농지 분배를 실시하고 지배층의 특권의식을 불식시켰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면서 신상필벌의 원칙을 따랐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다스린지 5년만에 나라에 도둑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 가지 않았으며, 길가의 과일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도 따 가는 사람이 없는 등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 졌다고 합니다.

<<공자세가>>에 보이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魯)의 정공 14년, 56세가 된 공자는 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부 장관)가 되어 법을 집행하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그의 덕화정책이 노나라의 구석구석에까지 미쳐 물건을 사고팔 때 속이는 법이 없어졌고, 남녀간에 음란한 일이 사라졌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아 외국 여행자가 노나라에 이르면 관의 손을 빌지 않고도 잃은 물건을 찾을 수 있어 그들을 만족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법이 잘 지켜진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만드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고, 그것이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도불습유>와 비슷한 말로 ^^~
路不拾遺(노불습유)라고도 합니다.또 ~ 유사한 표현으로 [道不拾遺, 夜不閉戶(도불습유, 야불폐호;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고, 밤에 문을 닫지 않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이 10 년에 1 번씩
8 번이 바뀐 ~^^지금
어릴때 아버지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바라건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아무도 주어 가지않는

깨끗한 마음과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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