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風景 일곱
<< 대박 간증干證 >>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은 베드로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계시를 지닐 수가 있다(마태복음16:13-17)-
하루 종일 일터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룬 후 삶에 지친 n 교회 목자들이‘그날의 피로는 그날로 푼다’는 감성을 호소하는 박카스 같은 삶의 한 줌 생기를 말씀에서 얻고자 불금(불타는 금요일)도 반납한 채 不遠千里 달려와서 목자모임에 참석했다.
그러나 오늘은 목자들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頭緖없는 지루한 過去로의 干證 旅行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스크린에 떠 오른 흐릿한 자막글씨와 쥐방울만한 사진들이 몽따쥬처럼 군데군데 올라와 한켠에서 파르르 떨고 서 있고
通譯을 담당한 O 목사와 소개와 함께 干證을 시작한 漢族 자매 간증자의 간증이 시작되었다.
......
휴...휴...휴...
.......
애고애고
.......
起承轉結도 확실하지 않고 임팩트도 없는 간증은 길어도 너무 길다.
끓다 만 설렁탕처럼 맛도 없이 밋밋하게 이어지는 말 속에 갈증을 느끼며 병 물을 찾았다.
벽에 붙은 하얀 벽시계의 시침도 어느새 앞으로 한 칸을 걸어 서 먼저 나갔다.
묘한 맛이 혀끝을 타고 머리속을 휘젓고 다닌다.
뒷 테이블의 어느 장로 목자는 눈을 감은 채
‘음-’하고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신음소리에는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후의 삶의 변화로 세부분을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다 살을 부쳐야하는데....’마치‘틀림없이 초보 간증자일거야.... 암...간증을 처음 하는듯하니 이해하고 끝까지 들어 주어야지.’하는 말이 실려 있는듯했다.
연예인들의 간증이나 탈북자들의 간증들처럼 짜릿한 전율이 순간순간 온몸을 감싸는 감동을 기대한 듯한 어느 젊은 집사 목자는 시간이 흐르자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뒤틀다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그것은‘이 지루한 느낌은 뭐지?’ ‘너무 임팩트가 없잖아’라고 抗議라도 하는 듯 보였다.
社會 같으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갈듯한 임계점에 다다른 어느 괄괄한 성격의 권사 목자는 연신 엷은 미소를 띄우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소셜 포지션을 의식한 듯 말이다.
그러던 중에 ‘중국에서 동역하는 자매들이 오늘 저녁의 간증을 위해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통역 목사를 통해 듣자 왕방울만하게 눈이 커지며 간증자의 눈과 눈을 맞추고 눈웃음을 지으며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그 간증자는 始終一貫 그런 목자들의 모습을 아는지모르는지 아랑곳도 하지 않고 慈顔愛語(자안애어: 웃는 얼굴 사랑스런 말씨)로 끝날 듯 끝나지 않은 간증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나도 그들과 예외일 수는 없었다.
처음에 은혜로 다가오던 간증이 서서히 머리속에서 퇴색되어 뒤죽박죽 엉키는 듯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샹띠’(이날 간증에서 유일하게 통역 없이 알아듣는 단어)라는 말이 간증자 자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귀를 의심했다.
‘샹띠?....’
샹때는 우리말로 상제上帝다.
全知全能하시고 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시다.
아직도 중국에서 그렇게 불리다니......
기원전 6세기이후 공자 사상과 도교가 등장했고 기원전 1세기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며 중국인들에게 잊어지게 된 썅띠라는 말이 중국인들 가슴속에 아직도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니...
중국의 고대 한자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초에 등장한 남자와 여자는 지성을 가진 거룩한 존재로 특별히 창조 되었고 이 최초의 인간은 창조주가 지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그 창조주의 이름은 하늘 상上 ,황제 황皇의 뜻을 담은 샹띠(상제上帝)라 불렀다.
샹띠는 이름그대로 하늘의 통치자이다. 천국의 통치자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샹띠를 경배하고 성스러운 제사를 드렸다. 대명회전에도 샹띠를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고대 중국의 왕들은 4천여동안 해마다 태산에서 옥외에 제단을 쌓고 하늘의 통치자인 샹띠에게 흠 없는 어린 숫소를 잡아 순전하게 제사를 올렸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듯 말이다.
공자도 서경에서 순 황제(기원전 2230년)가 샹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들이 샹띠에 드리는 제사의 기도문은 바로 창세기(1:1-2, 1:27)와 똑같으며 샹띠는 한 분이다는 성경의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
샹띠라는 한 단어를 중국에서 온 알지도 못하는 한 자매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다시 깨닫게 하시다니......
순간 옷깃을 다시 여몄다.
간증이란 이렇게 임팩트 하나 없이도 말 한마디, 단어 하나
에도 일시에 무너져 감동이 물밀듯 밀려오는 구나.
그럴 수 가 있구나.
‘너도 나처럼 그럴 것이다’ 지래 짐작하며 속단했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간증이라는 한자를 보면 간干자는 방패가 아니라 죄를 범하다는 뜻을 나타내며 증證은 증인이다. 간증은 본래 범죄와 관련된 말로 시작되었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백하고 고백하는 뜻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
罪人인 내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으며 간증자의 말에 曰可曰否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날 저녁, 간증을 듣기 위해서 모인 목자들도 나와같이 지루하고 너무나 평범한 간증을 들으면서 그 속에 담긴 간증자의 진실에서 느끼는 겸손함과 헌신과 백 프로 주님을 의지함에서 오는 평안함을 말없이 느꼈으리라.
동역자들의 뜨거운 기도 속에 함께 동행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용사로서의 자부심을 나처럼 배웠으리라.
좋은 간증이란 간증을 듣는 사람이 간증을 듣고 그 간증자를 잊어야 한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부러움을 사는 간증이 되어서는 더욱 안된다고 한다.
간증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간증자가 아니라 간증자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생각나는 그런 간증을 해야 한단다.
영원히 인류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서 알파와 오메가이신 아버지를 다시 배우게 한, 한 자매의 간증은 적어도 나에게는 대박 간증이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간증은 조금- 길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보내 주는 문자 한방에도
쉽게 감동을 받는 답니다.
다음번에는
짧고 굵게 한방에
감동을 주는
그런 간증 아시죠?
부탁합니다.
제발!’
2018년 5월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