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목요일) 정국현의 아침斷想
정국현 歷史小說
불국토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⑫ 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황복사의 가람嘉藍(승가람마의 줄인 말로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 절의 건물을 통칭한다)은 원래 1탑식 직교형直交型 평지가람이었는데 거매금 이홍(효소왕)때 중건을 해 2탑식 산지가람으로 변모해 있었다.
금당과 탑을 중심으로 좌경루, 남문, 회랑이 있고 초석 밑의 하부구조는 건물 기단구축을 한 다음 초석 밑을 깊고 넒게 파서 적심석을 차곡차곡 쌓아 다져 평평한 초석을 앉힌 전통 방식 그대로 따라 지어져 있었다.
(적심석積心石이란 초석이 놓일 위치의 땅을 생땅이 나올 때 까지 파서 웅덩이를 파고 잔자갈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법이다.)
대사전극의 안내를 받으며 김문량의 일행은 위사들이 지키고 있는 중문을 지나 금당金堂(법당) 뒤 강당講堂으로 가 섬돌 아래 시립하고 김문량 홀로 강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섯 개의 수면獸面다리에 여섯 개의 꽃잎을 상 하반을 가진 장중하고 화려한 두 개의 금동감옥촛대金銅嵌玉燭臺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숙위병사들의 눈과 굳게 다문 입술 위에서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그사이-거매금 이홍(효소왕孝昭王)이 대소帶笑(웃음띤 얼굴)하며 좌정해 있었고 바로 뒤에는 단아한 한 여인이 앉아 눈웃음 짓고 있었다.
신목왕후였다.
김문량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시오. 이찬! 그간 고초가 커시었소.”
아직 소년티를 못 벗어난 듯 가늘고 여린 미성의 옥음이 내렸다.
그랬다.
김문량이 김흠돌의 난 때 연좌되어 귀양길에 오르자 신문왕은 모반을 일으킨 상대등을 비롯한 귀족들의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었고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죄를 물어 궁중에서 내쳤었다. 그리고 친형 김흠돌과는 달리 덕망이 아주 높은 일길찬 김흠훈 딸을 새 왕후로 맞이했었다.
신라본기 신문왕 3년 계미A.D 683)조에는 이날 새 왕후를 맞이하는 혼인과정을 이렇게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 일길찬 김흠훈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하여 먼저 이찬 문영, 파진찬 삼광을 보내어 기일을 정하게 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납채(함)를 보내었는데 폐백이 15상자요,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상자요, 벼가 150수레였다. 5월7일에는 이찬 문영과 개원이 김흠훈의 집으로 가서 부인 책봉을 하고 묘시에 파진찬 대상과 손문 그리고 아찬 좌야와 길숙 등을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 그밖에 양부, 사량부 여자들을 30명씩 함께 보내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를 타고 좌우에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시종하는 것이 심히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분이 이홍理洪(이공理恭으로 개명) 거매금(왕)의 어머니 신목왕후였다. 그리고 지금은 모후로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이홍은 신문왕이 692년 승하하자 신라 32대 거매금으로 등극 했다. 691년 5세 나이로 태자가 되고 이듬해인 6세 나이에 왕이 된 것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그는 아버지를 위해 삼층석탑을 이곳 황복사에 세웠고 자주 찾아와 부왕의 명복을 빌었다.
오늘도 부왕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 아래 월성을 빠져나와 이곳 황복사 강당에서 은밀히 김문량을 친견하고 있는 것 이었다.
이때 거매금 이홍의 나이는 겨우 12세였다.
이찬이라니.. 갑자기 이등 이찬이라니...김문량은 귀를 의심했다.
“경은 들으시오. 황고皇考(임금의 아버지 선왕)께옵서 승하하시기전에 늘 나랏일 위해 노심초사하며 선공후사先公後私(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우선한다)했던 경의 말씀을 많이 하셨소.
그리고 경을 꼭 다시 불러 집사부의 수장으로 삼아 나랏일을 함께 의논하라 하시며 집사부를 개편하시고 파진찬을 부를 때를 기다렸소. 그러나......그만.....(붕어崩御하시고 말았소.)......”
낭낭 한 신목왕후의 목소리가 흐느끼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김문량은 느꼈다.
“ 이제라도 황고皇考(임금의 아버지 선왕)의 유지를 받들게 됨은 천복이라 여기오. 또한 이리 늦게 경을 부르게 됨을 용서하시오. 내 간곡히 부탁드리니 사양마시고 집사부의 중시中侍 수장으로 거매금을 잘 보필해 주시오.”
집사부의 중시가 그동안 왕명 출납과 기밀사무만을 관장 해 오던 것을 신문왕이 중시의 지위를 상승시켜 기존 귀족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국왕중심의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모든 중앙기구가 왕권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 6전(이부, 호부, 예이, 병부, 형부, 공부)체제를 완성함으로 국왕이 행정기구들과 효율적으로 상호작용 하도록 편제를 개편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시 지위를 격상시켜 귀족 세력을 대변하는 상대등을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중시 아래 위화부등 13개 부를 정리함으로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정리했다.
실질적인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