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현 歷史小說
불국토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⑪ 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실로 얼마 만에 다시 오는 고향인가!’
김문량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크게 심호흡을 하자 폐부를 찌르는 청량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 울려 북받치는 벅찬 감동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 살아서... ...정말 살아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
한시라도 잊지 못하던 그리운 얼굴들이 실바람에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의젓하게 잘 자랐을까?’
강보에 쌓여 경조 편에 흥륜사로 보낸 핏덩이 대성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다.
비 꽃이 하나 둘 관도 위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문량은 병영이 있는 굴아화屈阿火(현 지명: 울산. 가라벌로 큰 고을. 큰 성이라는 뜻)에서 자신이 승부乘府의 최고 책임자인 유사有司로 있을 당시 감독해서 확장한 관도를 따라 서라벌 낭산狼山으로 길을 잡았다.
승부乘府란 관도의 개보수, 건설, 확장공사를 총괄하고 우역의 숙식 시설과 말의 대여 등을 총괄하는 관청이다. 요즈음의 도로공사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김문량은 굴아화에서 서라벌에 이르는 이 길을 상하층으로 다시 축조해 보수할 때 관도 하부에 암갈색 점토를 다져 깔았고 그 위에 깬 돌과 자갈을 깔아 표면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하층 양쪽에는 돌로 배수구 만들어 설치했었다.
두께는 5미터, 폭은 2미터가 되도록 확장 해 수레와 군사들이 자유롭게 지나다니도록 최신 설비와 시설로 공을 많이 들어 공사를 마무리했었다.
‘ 이 길을 살아서 다시 밟고 가다니....’김문량은 실로 감개무량 感慨無量했다.
그 순간 관도 위를 말발굽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치장한 수레 한대가 굉음을 일으키며 굴아화 방면으로 달려 나갔다
김문량은 5두품의 마차임을 직감했다.
438년 나라에서는 귀족과 백성에게 우차법牛車法을 만들어 수레 이용을 가르쳤고 22대 지중왕 재위 6년 무렵인 505년부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적극 장려하기위해 구체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시행 했었다.
수레는 승용수레와 짐수레로 세분하고 왕족인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귀족들만 탈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하면서 신분에 따라 수레와 말을 치장하도록 했었다.
비 꽃은 놋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지나 저 멀리서 누에 고치모양으로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낮은 구릉이보였다. 신라인이라면 누구나 신성시 하는 서라벌의 진산인 낭산狼山이었다.
낭산狼山은 누에고치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산허리는 잘록하여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있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 사찰인 사천왕사가 있으며 낭산 허리부분에는 선대왕인 문무왕의 화장터인 능지탑이 있는 곳이었다.
낭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다보면 황룡사와 분황사가 서쪽으로는 궁궐인 월성이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아래 6촌 중 하나였던 설씨 성을 하사받은 명활산 고야촌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굴아화(울산)으로 연결된 도로와 넓은 들판이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신라 실성왕12년(413년)에 구름이 일고 오랫동안 향기가 나자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닐던곳으로 여기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한 기록이 있어 더욱 왕실에서 신성시 생각하는 곳이기도 했다.
김문량은 낭산 동북쪽에 자리 잡은 의상대사가 출가한 황복사皇福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길을 걸어오면서 그는 그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노여움과 슬픔과 모든 불평까지 모두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보인다.’는 점개선사의 법문이 다시 환하게 들리며 마음이 대안大安해졌다.
그는 찰나에 대안대사와 점개선사의 인사의 의미를 확연히 깨달았다.
솔바람이 소나무 잔가지들을 흔들며 낭산 자락을 맴돌아 나갔다. 김문량은 그 바람결에 250여 년 전 이곳에서 산 백결선생이 뜯는 거문고 소리가 실려 있음을 느꼈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기쁨 충만한 울림- 그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있음을....
희노애락(구)애오욕喜怒哀樂(懼)愛惡慾- 이 칠정을 거문고 6줄에 실어 연주한 거문고의 명수인 백결선생百結先生, 그는 관직을 떠나 궁중으로부터 일체 후원을 받지 않고 청렴결백하게 낭산 자락에 살았다.
눌지 마립간때 문신 박제상의 아들로 박문량이 본명이나 사람들은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다 해서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섣달 그믐날 아내가 이웃집 떡방아 소리를 부러워하자 떡방아 소리 대신 아내에게 거문고를 뜯어 방아소리를 내었다. 그것이 대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었다.
황복사에 처음 보는 삼층석탑이 저 멀리에서 다가왔다.
김문량은 처음 보는 삼층석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석탑은 김문량이 귀양을 떠난 10여년 뒤 692년 신문神文대왕이 붕어하자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탑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실 수호 사찰인 황복사皇福寺에 막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석탑 앞으로는 점개선사와 대사 일인과 대사 전극이 여러 승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거매금(왕의 호칭)께서 친히 납시어 계시옵니다.”
대사전극은 공손히 합장을 했다.
(계속)
<<皇福寺 3층 石塔>>
무제1
望齊 鄭禧燮
급시인사배전망
지한무연와초당
녹음수리앵가만
화우사중노몽장
기금대화정유족
시주항수채역향
항아세계인가작
수설천현우지황
無題 一
及時人事培前忙
只恨無緣臥草堂
綠陰樹裡鶯歌晩
花雨沙中鷺夢長
基金對話情猶足
詩酒相酬菜亦香
姮娥世界隣家作
誰說天玄又地黃
세상사 이를 때 없어
더욱 바쁘나
다만 아무 연고 없어
초당에 누웠으니
한 스럽도다
한 낮이 기울은
녹음 사이엔
소쩍새 울음 울고
꽃잎이 휘날리는
모래사장엔
해오라기 꿈은 한창 길도다
바둑과 거문고로
이야기 하노라니
우정은 유족하고
흥겨운 시 읊어 술 한 잔을 돌리니
안주로 무친 나물 향기롭구나
선녀가 사는 달나라에
이웃집 짓고
누구에게 말하랴
하늘의 오묘함과
속세의 번잡함을
(望齊集에서 譯: 정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