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현 >>의 아침마당

11 월 17 일 (금요일)<鄭國鉉>의 아침 斷想

chung si yoo 4932 2017. 11. 22. 23:06




이미지: 사람 1명, 정장, 밤, 실내


<< 佛國土에 핀 예수>>

11월 17일 (금요일) 정국현의 아침斷想

정국현 歷史小說

...

불국토佛國土에 핀 예수

1. 구도자求道者의 길

⑤ 황무지에 뜬 새벽별 하나

백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는 거친돌로 쌓은 석성石城이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 17리里(7km)나 이어지고 있다.

금돌성今突城(금돌산성)이었다.

금돌산성은 백화산과 헌수봉 사이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包谷式성이다.
보문곡을 가운데 두고 산 정상인 한성봉을 한 변으로 하는 내성을, 그 동쪽으로 외성이 쌓아져 있었다.
그리고 자연석을 바닥에 깔고 5척尺(1척은 30.3cm) 높이로 벽을 쌓아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기에 적합하게 주변의 자연석들로 쌓아두었다.

깎아지른 절벽사이로는 구수천의 외성과 수문水門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들어왔다.
점개는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성문 누각에서는 서둘러 핀 철 이른 단풍들이 하나 둘, 곡풍(낮에 골짜기에서 간 꼭대기로 향해 부는 바람)에 흩날리고
신라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오색 깃발들 사이에서 입초를 서는 병사들의 굳게 다문 입술위로 서슬이 퍼렇게 묻어나고 있었다.

성문 위 누각을 오가며 파수를 보는 동초 한명이 큰소리 외쳤다.

“ 시님! 시님은 어디서 오셨소?”
“ 서라벌에서 오는 중이라오.”
“ 이곳은 아무나 출입하는 곳이 아니라오. 시님이시니 한번 봐 드릴 터이니 볼기짝 치기 전에 빨리 돌아나 가시오.”
남루한 행색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점개를 보고 병사하나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랬다.
이 성은 성문 입구만 보더라도 오금이 저리고 주눅이 들게끔 현문식으로 설계가 되어있어 ‘살벌함’ 그 자체였다.

현문식 성문이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이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높이부터 시작한 다락식 성문이다. 그리고 사다리를 놓지 않고는 성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다.

60여 년 전 무열왕 7년 (660년 6월21일).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무열왕 김춘추가 김유신, 품일, 흠춘 등 백제 정벌군을 떠나보내며 사용한 총지휘소로 백제가 항복하고 소부리성(부여 사비성)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머문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며 전초기지이었다.
당시 임시 황궁이 있던 이곳 금돌산성에는 지금도 황실 직할 정예부대가 수도 서라벌을 방어하기위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 금돌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황실 직할부대에는 사벌(상주)정 밑에 작전참모들의 회의 처인 군사당軍師幛이 있고 그 아래로는 축성과 토목 기술자들로 구성된 대장척당大匠尺幛(보병부대), 기병에 맞서 싸우는 장창부대인 흑의장창보미당 黑衣長槍步未幛, 보기당步騎幛, 삼천당三千幛과 화살을 사용하는 궁척弓尺부대와 도끼와 방패를 사용하는 만보당이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시님! 빨리 돌아가시오. 치도곤 놓기 전에.....”
또 다른 병사가 다시 고함을 쳤다.

화급을 다투는듯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2층 성루에는 두 개의 깃털을 나란히 꽂은 조우관을 쓴 적의 赤衣(붉은 옷)를 입은 화랑 한명과 그를 호위하는 청의靑衣(푸른 옷)를 입은 낭도 열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적의赤衣를 입고 긴 칼을 찬 화랑은 진골 김대정金大正이었다. (계속)


대영 對影
지변독자좌
池邊獨自坐

지저우봉승
池底偶逢僧

묵묵소상시
黙黙笑相視

지군어불응
知君語不應

그림자를 마주보며

못가에 홀로 앉았네
물 밑 한 사내와 서로 만났네
돌아보며 말없이 미소 짓는 건
말없이 아는 때문 (진각혜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