恩惠의 이슬

고마운 사람 [정시우 ; 鄭時祐 牧師] (3)

chung si yoo 4932 2021. 4. 14. 03:09

형과 나는 같은 부모의 피를 나눈 3 살 터울의 형제다 아명[兒名]은 형은 창수[昌秀]이고 나는 은수[恩秀]인데 내가 소학교에 입학 할 때부터 이름이 꼬이기 시작했다 형은 시우[時祐] *도울 우로 부르고 나는 시유[時裕]*넉넉한 유로 학교에서 호명을 했다 우와 유는 발음이 비슷하여 발음  노력 절감[節減]의 법칙에 의해서 유를 우로 불렀다  나는 가끔 *정시우가 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 같은 모순을 아시면서도 교회 일이 너무 바빠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게 좋게 정정 하지를 못했다 그 후 형도 대학에서 국문과를 전공하고 나도 같은 과를 이수했다 그리고는 걑은 도시에서 국어 선생으로 근무를 했다 형제간이니 언어 용모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유사했다 종 종 형의 여 제자들이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손을 잡고 껑충 껑충 뛰며 손을 놓치를 못하고  "선생님 마국 갔다 언제 오셨습니까  ? " 착각[錯覺하는 제자들을 실망시키기가 어려워 머뭇 머뭇 바보 노름을 할 때는 이것이 이름과 용모 탓으로 돌리기에는 참으로 슬프고도 서글펀 느낍이었다 미국에 이민 온 후도 교회 행사나 모임에 이름으로 인한 웃지 못할 Episode삽화[揷話]가 많다 어떤 교회 장로는 나를 보고 뛰어나와 "목사님 반갑습니다 차를 여게 세우세요 ...우리 교회에서 제일 좋은 명당[明堂]입니다 "하고 차문도 열어 주고 진정 반길 때 변명하기도 쑥스러고 힘들 때도 있었다 .형님 교회 협동 목사인 추[秋]목사는 나이가 9순이 지난 노년이라  나만 보면 "서두에 목사님하고 말을 시작한다"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치부하기도 설명이 번거럽다 . 이름으로 인한 걱정과 번거러움이  없을 때는 어릴때 <1938 년 경> 평양[平壤]에 살 때다  형은 어릴때부터 사회성과 친화성이 뛰어나 친구 만나기를 좋아했다 학교 가 파한 후 바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다 요즘 말로 똘만이를 두고  책가방과 공작 할 물건을 미리 집으로 배달 했다 큰 물건은 철도침목[枕木]<어머니 다듬이 돌 만들기 ><쓰래받기용 배니야 판> <가제도두용 목재>를  갖이고 와서 똑딱 똑딱 공구[工具]로<망치 대패 끌 자 못>등으로  제품을 했으니 어머니가 청소와 정리를 하는데 큰 수고를 했다

저녁에는 어머니 주무니에 은전[銀錢]을 털어 몇 종류의 하모니까를 샀다 <미야다 반도 / 야마하반도/ 돈보반도 / 토끼요반도/등 많은 하모니까  그 중에 내가 좋아 했던 하모니까는 복음[複音]하모니까다 둘다 하모니까 연주 선수요 프로다 소학교 창가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못 부는 곡이 없었다 그것도 2부 복음으로 참 즐거운 시기였다 형과 나는 특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 유도[柔道]다 밤 중에는 형과 둘이 온돌[溫突]방에서 서로 붙잡고

出足払(であしはらい) 나오는발 차기 背負投(せおいなげ)업어치기 抱分(だきわかれ)허리안아 돌리기 首絞め

목조르기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문제는 동지섣달 평양의 유명한 추위 속에 구둘이 꺼저 내리 앉는 일이다 일제시대 교회 건물은 예배당과 사택이 교회 안에 붙어 있는데 다 새벽 기도를 드리는데 꾸땅땅 꿍 쿠땅땅 쿵하고 굉음[轟音]이 진동하니 장로들의 찡그리는 줄음살이 튀어올라 목불견[目不見]이 었다 , 다 지금 생각하면 코흘리게  꼬마의 실수가 정말 이만 저만이 아니다 죄값으로 형과 나는 냉방에서 잔 일도 있었다 주일날 주일하교를 빼먹고 보통강에 고기잡이를 간 일이 있었다 돌아와 아버지한테 휘초리로 종아리에 피가 흘어도록 맞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흘어 과거 지사는 일언지폐지[一言之廢止]하고  내가 형님의 권유로 미국에 이민 온 후 이제 40 여년을 형님과 같이 지내기 되었다 형만한 동생이 없다고 형은 아내 정권사가 병으로 입원 했을 때  그의 매일 병원에 제수{弟嫂]를  찾아와 기도하고 위로 했다 원근[遠近]간 F way 를 타고 위문 안 온 적이 없다 학교 출석에 비유한다면 개근[皆勤]이다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간혹 음식이나 금 일봉[一封]도 잊지 않았다 나는 형수[兄嫂]아플 떄 그렇게 못했다 국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큰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했다 큰집 가족들이 거의 다 원근각처에서 다 조문[弔問]을 왔다 내가 당하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어릴때 형제간 아무리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해도 9순의 노인이 되어 그 정을 유지 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지면[紙面]을 빌어 형님께 고마움울 전하다...   형님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