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봉목사 생애와 사상 (3) 중
*이성봉 목사와 정희섭 목사와의 관계* ~ 당시 정희섭 목사는 동경 교회 목회 시무 중 부흥회 인도로 한국에 출타하고 돌아올 때까지 몆 달 간 이성봉 목사가 주일 설교를 맡아 했다 . 이성봉 목사는 많은 부흥회 인도로 심령적으로 피곤하여 안정적인 교회 목회를 원하여 지방회장 김경만 목사와 짜고 교단 책임자인 이명직 목사에게 동경 교회 시무를 청탁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전임 천세봉 목사 벅현명 목사가 정희섭 목사 편에서 불가(不可_)함을 주장하여 사건이 야기 되었다.그 후 정희섭 목사는 조선 나사렛교회 포교사로 평앙 신양리교회로 부임하고 이성봉 목사는 만주 부흥 선교에 주력 했다. 기사 내용과 같이 서로간 오해가 있었으나 기도 중 오해가 풀리고 후일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던 대구 제일 성결 교회를 정희섭목사에게 후임으로 청탁했다
10. 일본전도시대
내가 40세 되던 해 봄에 신학을 연구하러 일본에 건너갔었다. 그리하여 일본 신학 연구과에 입학하여 놓고도 영혼 구원에 불타서 거기서도 우리 동포들의 교회와 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동경(東京), 대판(大阪), 풍교(豊橋), 신도(新島), 광도(廣島) 등 각 곳으로 다니며 집회를 하였다. 상근성회, 유마성회 등에 참석하여 나의 간증과 독창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방수원 목사의 주선으로 나의 독창 몇 가지를 레코드 취입하였었다. 그것은 "인생 허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나의 기쁨 나의 소망",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이었는데 대단한 인기였으며 많이 팔렸다.
*"동경 성결교회에서 집회하고 그 교회의 정 목사가 한국에 나오게 됨으로 그 교회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몇 달간 강단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가 되어 내가 지방 회장과 결탁하여 자기를 내몰았다는 원망을 들었다. 그러나 범사가 주께로부터 오는 줄 알아서 감사히 받을 뿐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그는 후에 잘 이해가 되어 다시 본 단체로 돌아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
마귀들은 항상 이간을 붙여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횡빈(橫濱)에서 집회할 때였다. 그 교회 정씨라는 사람이 회개하며 애통하기를 "내가 주님의 가슴을 오랫 동안 아프시게 하여 드렸으니 내 자식이 내 가슴 아프게 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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