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용

스크랩 참고용 고전 4 ; 14-16

chung si yoo 4932 2019. 2. 3. 08:24

=====4:14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풍
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
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
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극한 분노와 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권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한편 '부끄럽게 하려고'(* , 엔트레
폰)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는데(6:5;15:34) 그곳에서는 오히려 부끄럽게 하
려고 경고의 말들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은 그것과 다른 의도를 지
향하고 있다. 그는 격한 분노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함과 같은 위로를 나타내려 하였
음을 바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적
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권한다'는
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엡 6:4)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사랑'
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선
명하게 나타난다.

=====4:15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
)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
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
도록 돌보는 노예들이다(slave-guide).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
(갈 3:24)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
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1)하나는 '가르친다'는 지
식적 개념이며 (2) 또 하나는 '지도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이다. 로버트슨(A.T.Robrt-
son)은 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가정 교사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이해하며,바
레트(Barrett)는 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지도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부정
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본절에서는 가르치는 것과 지도권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해
석상에 무리는 따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의 의도는 단지 '일만'(*
, 뮈리우스)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J. Calvin).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
인들에게 영적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요
구하지는 않았지만(12절)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
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절;갈 4:19) 돌아올 것을 강청한다. 바울은 모든 복음
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
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
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및 권
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
여주기 위함이다. (2)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
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고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서 '아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
과 밥으로(3: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
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
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1:3;3:2). 그러므로 그는 그들
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 12) 심한 책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6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
다(갈 4:12;빌 3:17;살전 1:6;2:14;살후 3:7,9).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
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
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
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
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
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
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
의 실천과 (2)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4:17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실라와 함께 제
2차전도 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때이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
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그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충실한 일꾼이었으며 바울의 사역 후반기에는 마가 이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하였
던 동역자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파송한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와 동행하고 있지 않음에도(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에서 하역 중)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디모데를 파송하는 것은 그
만큼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신임이 큰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절의 파송은
16:10, 11의 기록과 비교해 볼때 약간의 난점이 제기된다. 본절의 '보내었노니'(*
, 에펨프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으나 16:10,
11은 미래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레트(Barrett)는 서신상에 쓰여진
부정 과거는 때로 현재 시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
현재 파송되지만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보다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디모데가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하도록 명령된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렌스키(Lenski)는 편지는 배편으로 보내지고 디모데는 육로를 따라 갔기 때문이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편지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
고 그를 파송하는것은 그 만큼 (1)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하며
(2)그의 표현대로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편지를 고린도에 보낼 즈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통
해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음을 알 수있다(행 19:22).
각 교회에서 기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문맥에서 볼
때 각처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
다. 바울은 디모데를 특수한 임무로 파송(派送)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특수한 처방법
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지난 날의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잊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렸던 복음의 능력들을 상기시키
려고 한다(1:18). 왜냐하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의 말
씀의 능력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딤후 3:16, 17).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 이것
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다. 바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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